트라우마

생각 2021. 4. 20. 00:29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학교에서 수련회나 수학여행을 갈 때면 등굣길 엘리베이터에서 울었다. 돌아오면 엄마가 죽고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조심스레 친구한테 '나 아침에 울고왔어' 고백하는데 친구의 그 의아해하는 표정이란. '이해는 되지만 울정도는 아니지 않나?' 하던 그 말이 머리에 남아서 되도록이면 나도 아침에 울지 않으려고, 울어도 빨리 그치려고 애를 썼는데 당일이 되면 몇방울이라도 꼭 눈물이 흘러야만 학교로 갈 수 있었다.

 

  난 왜 그럴까.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나는 그런 날 우는 그런 애였고. 뭐 그 나이에 감수성이 좀 예민했나 보지. 하고 살았는데 이번에 남편이 시험문제 출제차 국가에 납치를 당하게 되어(?) 카톡은 무슨 문자나 통화도 할 수 없는 '완전 통신 단절'의 일주일을 하루 앞둔 날 밤. 연락이 안 되는 동안의 일들이 조금 걱정이 되긴 해도 남편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나, 불안해서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라는 게 문득 자각됐다.

 

  어? 이게 되는 거였어?

 

  그 때는 왜 안 됐는데? 자각하는 순간 뇌는 아주 빠르게 과거의 사건들을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답을 찾아왔다. 때는 초등학교 6학년. 1반 2반 합동으로 단체 졸업 여행을 가는 날이었다. 엄마가 아침에 편지를 줬고 나는 그걸 기차에서 읽었는데 나 졸업여행 다녀오는 동안 엄마 수술 잘 받고 올테니까 친구들이랑 추억 많이 만들고 오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엄마는 엄마가 수술한다는 걸 나한테 미리 말하면 내가 졸업여행을 안 갈까봐. 엄마 때문에 친구들과의 추억을 포기할까봐. 내가 출발하는 당일까지도 비밀로 했던 거였다. 나는 정동진 가는 기차 안에서 편지로 그 소식을 처음 들었고 당연히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그래도 어떻게 해. 기차를 돌려 집으로 다시 갈수도 없고. (사실 돌아가도 엄마는 이미 병원에 가고 없다) 하루종일 마음만 졸이다 밤 10시 반쯤 다시 울산으로 돌아왔는데 이모가 역으로 마중을 나와있었다. 그때 당시 어린 내 생각에는 수술이 잘 되었으면 엄마가 마중을 왔어야 했는데 엄마가 안 오고 이모가 나왔으니 이건 뭔가 필히 잘못된거였고. 이모가 아니라고 수술 잘 됐다고 하는데도 엄마랑 통화할 때까지 계속 울었던 것이다.

 

  아. 이거였구나.

 

  이래서 그런거였구나. 그동안 이해되지 않던 내 행동들이 한마디로 정리가 되고 머릿속이 깨끗해진 게 너무 뿌듯해서 남편에게 자랑하려고 '있잖아!! 나 비밀이 있는데!!!' 하고 운을 떼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분명히 아까 누워서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신기한 사실 공유차 가볍게 던진 말이었는데. 차마 그 뒤를 이을 수 없을 만큼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다니. 한참을 울고 다시 말하고 다시 울고 다시 말하고 다시 울고 다시 말하고. 정말 눈물과 콧물 그리고 혼란의 도가니탕이었다. 남편도 '오! 뭔데뭔데' 하고 눈을 반짝이며 듣다가 갑자기 날벼락을 맞아버린. 지금 생각해보니까 너무 웃기네. 아무튼 그렇게 눈물이든 콧물이든 이야기든 왕창 털어내고 나니 엄청 후련해졌다.

 

  이런게 치유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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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2021. 2. 22. 18:33

  꿈에 네가 나왔어. 우리가 헤어지고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잠깐 떠올려봐. 이제 한 손으로도 다 못 꼽을 정도의 세월이구나. 벌써 그렇게 됐네. 그 긴 세월동안 너는 작가가 되어있었어. 몇 권인가 책을 냈고 유명하진 않아도 제법 글로 먹고사는 사람 티가 나더라. 아주 오랜만에 만난 내게 너는 아주 작은 책을 줬어. 그 책엔 네가 썼던 몇개의 꼭지글이 있었고 그 글의 모델이 나라는 건 세상에 너와 나밖에 모를 일이었지. 네가 보던 나와, 나를 보던 너의 마음이 그 꼭지글들에 그대로 들어있더라. 얼굴이 조금 빨개졌을까. 심장이 콩닥콩닥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어. 그때 네가 반지를 끼워주면서 내게 청혼하더라. 너는 내게 "결국, 우리는 이렇게 될 거라고 난 알고 있었어" 라고 굉장히 결연하고 담담하게 얘기했어. 그 목소리를 듣고나니까 아주 오래 전의 내 마음과 내가 좋아하던 네가 마구 섞여서 떠오르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라. 정말 영겁과도 같은 1분이었어. 그리고 딱 1분 뒤, 나는 숨을 고르고 너에게 얘기했어. 나는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다고. 아직 그 사람과 결혼을 약속하지도 않았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그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너를 좋아했던 마음이 저기 어딘가엔 아직 살아 숨쉬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찾고싶지 않다고. 내가 지금 좋아하는 건 다른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했어. 그 때 너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아마 중요하지 않아서겠지.

 

그 정도의 사람이 되었나봐 내게.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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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_17살의_나를_만나게_된다면

생각 2020. 5. 22. 06:06

  넌 지금 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거야. 기억해. 그건 나쁘거나 틀린게 아냐. 너의 시간이 내게 이르기까지 힘껏 살아줘. 다음에 네가 날 다시 만났을 때 절대 네가 후회하지 않도록 준비하고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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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이_슬었다로_시작하는_글쓰기

생각 2020. 5. 22. 06:01

  녹이 슬었다. 억지로 움직이려니 삐그덕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빨갛게 도드러진 접합부를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쓸어본다. 다 나을때까지 살펴주었어야했는데. 전부 내탓이다. 다친 마음을 충분히 다독이지 못한 내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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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가_식었다로_시작하는_글쓰기

생각 2020. 5. 22. 05:48

  홍차가 식었다. 오늘 오후는 유난히도 더디 지나가는 모양이다. 달그락. 괜스레 죄 없는 스푼을 저어본다. 그러면 혹 남은 온기라도 피어오를까. 금방이라던 너에게선 연락이 없고 하늘은 티없이 맑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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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다툼

생각 2019. 4. 12. 15:18

  그런 날이 있다. 말이 밉게만 나오고 아무리 돌려 생각해보려해도 꼬아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날. 맞아. 오늘이 그랬다. 백번을 합리화해봐도 내가 나빴다. 그러려니 넘어가고 맞춰줘도 되었을 일을 괜히 들쳐서 아끼는 이의 마음을 부숴놓았다.

 

  "네가 싫다는 일은 안해.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어"

 

  뚝뚝 떨어지는 당신 눈물을 보며 정신이 들었다. 생색은 커녕 내색도 않는 사람이 당신이었다는 걸. 당신의 최선이, 당신만의 최선일리가 없다는 걸 잊고 있었다. 내 잘못이다. 오늘 일을 쉽게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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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생각 2019. 4. 12. 15:14

  쓰레기 봉투에 꽉꽉 눌러담아 세 번을 버리고도 아직 파쇄할 편지가 남았어. 미련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우리의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노라고 아무리 스스로를 설득해보아도 지금은 할 수 없어. 그때의 그 고운 마음은 쓰레기통에 냉큼 가져다버리기엔 너무 벅차. 

 

  넌 그 많은 편지를 태우면서 어땠니.

 

  아프던 내가 혈색을 되찾고 세상에 둘도 없을 다정한 사람을 만나 다시 웃는 걸 보며 넌 무슨 생각을 했니. 너의 그 마지막 말은 무슨 의미였니. 다시 만나서 한번 물어나 볼까, 생각했던 때도 있어. 그래도 끝끝내 널 보지 않기로 결심한건. 내가 그냥 세상 행복한 전 여자친구로 네게 남기로 한 건. 내 호기심보다 중요한 무엇이, 이제 생겼기 때문이야.

 

  남은 편지는 이제 세통. 위경련인지 마지막으로 널 보내는 아픔인지. 이름 모를 흉통을 몸살처럼 앓고서 그래도 힘을 내야한다며 억지로 길을 나서던 날. 눈 앞에서 멈춘 너희집 가는 버스를 보고 아, 이별이구나. 싶더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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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생각 2019. 3. 8. 18:36

  별 생각없이 책을 구매했다. 아마 제목에 끌렸으리라. 어찌됐건 그 책은 우리집에 와서 몇 주 인가 방치 되다 어제 새벽, 드디어 내 손에 집혔다. 오래 뜸을 들이던것과는 별개로 난 세번째 장을 넘기기기도 전에 책에 푹 빠져버렸다. 울 것 같은 순간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것 마저도 너무 좋았다. 어떤 장에서는 문득 떠오른 옛 기억에 한참 동안이나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기도 했다. 마지막 장까지 무사히 덮은 후엔 책을 읽다 이렇게 생각에 빠져든 게 대체 얼마만이지. 그런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면 우리 외할머니는 참 정이 많으신 분이다. 정이 많으신 분이라고 쓰고 걱정이 많으신 분이라고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위의 그 소설을 읽다 요강- 부분에서 시작 된 외할머니 생각이 멈추지 않아 결국 눈에 눈물을 괴이고선 끝이 났다. 요강에 눈물이라니. 이렇게 축약하니 조금 우습다. 


  어쨌든 시작하자면, 우리 외할머니 댁 큰방에는 항상 요강이 있었다. 본인은 그 요강을 잘 쓰지 않으시지만 혹시 어린 우리가 새벽에 화장실을 가다가 넘어지거나, 부딛혀 다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외할머니 댁에서 잠을 자는 저녁이면 꼭 요강을 쓰게 하셨다. 나는 어린 나이었지만 남들 다 자는 방에서 요강을 쓰는 것도 부끄러웠고 엉덩이를 댔을 때 그 차가운 잘감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외할머니가 걱정하시니 외가에서 머무를 때면 늘상 밤에는 요강을 이용했었다. 그 요강은 항상 외할머니가 다음날 비우셨는데 두어번쯤 내가 비운적도 있다. 요강은 담는 용도이지 버리는 용도가 아니라 버릴 때는 정말 신경을 많이 써야했다. 입구쪽에 고여서 끝끝내 완전히 비워지지 않을 때도 있으니. 이런 얘기를 계속 쓰고있으니 글에서 요강냄새가 나는 것 같다. 하하. 


  외할머니가 또 신경쓰시는 부분은 우리 외손주들의 소화력였다. 암. 역시 사람은 먹고 싸는게 중요하지. 본인이 소화력이 약하셔서였을까? 항상 밥을 먹고나면 까스활명수를 따서 우리 셋에게 나눠 먹으라고 주셨다. 나는 반병정도, 동생들은 한 두 모금씩. 그 때는 외가에서 밥을 먹으면 까스활명수를 먹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그렇게 하는 것. 근데 이젠 안다. 세상 어떤 일에도 '당연'한 것은 없다. 외할아버지를 잃고 그 슬픔에 너무도 일찍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


  일전에 외할머니 생각이 났을 때는 나 결혼할 때였다. 엄마가 엄마의 엄마를 생각해서 그런가, 나도 자연스럽게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외할머니는 나 결혼한다 그러면 진짜 너무 신나서 동네 잔치를 열어 춤이라도 추셨을 분인데. 외할아버지도 정이 많아서 외할머니가 잔치를 열어야겠다 하면 냉큼 그러자고 하셨을 분인데. 남편을 데려가서 인사시키면 우리 남편이 술을 한잔도 못하는 게 아쉬우시면서도 내색도 못하고 그저 너무 좋아서 한참동안 남편 손을 꼬옥 잡고 계셨을텐데. 두 분 다 첫 외손주의 결혼이라 정말 좋아하셨을텐데. 내가 이정도로 아쉬우니 엄마는 아마 더 했겠지.



  조만간에, 산소라도 한번 찾아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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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생각 2019. 1. 23. 13:22

  작년에 들은 칭찬 중에 가장 기분이 좋았던 건, 역시 "네가 생각을 열심히 하는 애라 좋아" 이다. 정확히 말하면 칭찬의 의미로 건넨 말은 아니겠지만 '인생을 너무 피곤하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던 차에 들은 말이라 칭찬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의 근황인 결혼에 대한 것도, 요즘 한참 이슈인 페미니즘에 관한 것도 아니면 단순히 그냥 게임을 하다가도 정말 많은 생각, 질문들이 머릿 을 둥둥 떠다니는데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가서 그런건지 먹고 살기가 바빠서 그런건지 아니면 그냥 게을러진건지 한 생각을 꾸준히 길게 물고 늘어지는 걸 잘 못하겠다. 번뜩! 하고 떠오르면 한 몇분 고민하다 슥슥 지워버리는 듯. 그게 아까워서 조금이라도 고민했던 일들은 단톡방이나, 신랑과 나누고 있긴 한데 역시 그냥 대화로 흩쳐 버리는 것 보다 뭐든 기록으로 남기는 편이 좋지않을까 한다. 남편과의 신혼생활도 식이당이 에피소드로 만든 것과 그냥 둘이 깔깔거리고 웃고 넘어간 것은 기억의 양과 질이 달라서. 후우. 누가 끈덕지게 봐주지도 돈이 되지도 않지만 일단은 해볼까나. 생각도 행동도. 뭐든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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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of Conquest

생각 2018. 10. 23. 15:16

  나는 전략게임에 흥미가 없다. 전쟁게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내가 남편이 생겼다. 남편은 삼국지와 전쟁, 전략게임을 좋아한다. 각자가 좋은 게임을 하다가, 각자의 게임을 하다가, 각자가 좋아할 것 같은 게임을 해보는 요즘 Art of Conquest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리 둘 만으로도 재밌었다. 퀘스트는 끊임없었으며 특별히 과금을 하지 않아도 재미있게 플레이 할 수 있을정도의 완성도를 갖춘 게임이었다. 창, 기, 병을 고려한 배치에 드래곤은 물론이거니와 종족변경과 공성전까지. 요 근래 해본 게임 중 가장 흥미로웠다. 게임을 조금 더 재밌게 해볼 요량으로 새 서버에 들어갔다. 길드를 만들었다. 남편은 원래가 킹메이커-책사 타입인데다 본업이 바쁜지라 내가 길마가 되었다. 처음해보는 길마 자리는 어색했다. 하지만 금새 익숙해져 왜 길마들이 하루종일 접속해 있는지. 길원들의 관심에 목말라 하는지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우리 길원들은 말 그대로 꿩강했으며 다정했고 단합도 잘 되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는 다 이룰 수 있었다. 저 성 먹자고 하면 먹을 수 있었고, 이걸 지키자고 하면 냉큼 달려와 함께 지켰다. 하지만 게임이 반복될 수록 나는 힘들어졌다. 길마는 길드원들이랑만 게임을 하는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을 추대해야하고 관직을 받아야하고, 타국 길드와도 비 공식적 동맹을 끊임없이 맺어야했다. 심지어 우리 길드는 우리 국가 1등이었으므로 나는 그런 정치적인 관계에 더 밝아야했다. 그래도 정치적인 건 차라리 나았다. 가끔 트롤링하는 인간들을 참을 수 없었다. 길드장인 내가 멀쩡히 성문 앞을 지키고 서있는데도 제일 약한 길드원 성부터 불을 지르는 노랑 녀석들. 후우. 어느날엔가는 너무 속상해 남편을 붙잡고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냥 다들 몬스터나 잡고 사이좋게 지내면 안되냐며, 왜 이렇게 싸워야 하는 거냐며 그런 저 어디 왕국의 프린세스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광광 우는 나를 보고 남편은 오늘부터 게임을 그만두는게 좋겠다고 말을 했다. 재밌으려고 하는 게임인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지만 그만 두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우리 길드원들 다 열심히하는데 길드를 버리고 계정 삭제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새 길마를 추대했다. 길드 초기부터 열심히, 잘 해온 사람인데다 정치에도 밝아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길마를 넘기고 나는 소시민이 되었다. 오히려 소시민이 되고 나니 게임을 그만 두기가 무색할 정도로 즐거워졌다. 적당히 길마를 보좌하며 내가 하고싶은 정도만 집중하면 되니까. 지금 우리 길드는 두번쨰 왕을 추대하며 왕 후보자와 보직을 딜하고 있다. 우리 길드가 기사단장을 맡으면 좋겠는데. 흠. 일단 게임을 관두는 건 보류다. 후후. 즐거운 한도 내에서 우리 서버의 천하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찬찬히 구경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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