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따뜻한 문장

취향 2018. 7. 4. 14:20


따뜻한 문장

                                    서덕준


마음 한구석이 찢어졌구나,

아픈데도 말 한 마디 없었어?

삶이 그보다도 아팠나 보다.

이리와, 따뜻한 문장에 그은 밑줄을 가져다가

다친 마음을 꿰메어 줄게.


울음이 새벽보다 이르게 시작되는 날이 많아졌어.

무엇이 이렇게 너를 강이 되어 흐르게 하니

우는 일이 죄가 되지 않도록

네가 울음을 쏟는 동안

나는 녹음된 빗소리가 될게.

내가 더 젖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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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꾀병

취향 2018. 7. 4. 14:18


꾀병

                                    박준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새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에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게 그렇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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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아름달운 날에 부치다

취향 2018. 5. 28. 21:31

아름다운 날에 부치다

  

                                    박미라


생각하면, 우리들의 별은 얼마나 쓸쓸한가

이 쓸쓸한 지구라는 별을 함께 지나가자고

이제 한줄기 빛이 되는 두 사람


멀리 있었으나 서로의 빛을 바라볼 줄 알았고

어두웠으나 서로에게 다가갈 줄 알아

오늘 드디어 두 손을 잡는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동행임을 아는 두 사람은

잡은 손을 놓지 않되 함부로 잡아끌지 않을 것이며

서로의 두 눈을 고요히 바라보아

말하지 않아도 같은 쪽으로 걸어가리라


수채화처럼 아련히 번지는 꿈의 조각들이

거짓말처럼 들어맞을 때

두 사람은 비로소 행복에 대해 말하리라


여기, 하늘이 마련하신 그대들의 길이 있다

풀을 베고 돌을 고르고 물을 건너라

서로가 서로의 땀을 닦아주고 그늘을 권하라

풀섶에 핀 꽃을 함께 바라보고 들어낼 수 없는 돌을 만나면

서로의 어깨를 감싸안고 천천히 돌아가라

건너기 힘든 물을 만날 때면

물 위에 비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서라


먼 곳에 준비된 그대들의 낙원에 마침내 이르리니

해 뜨는 쪽으로 큰 창문을 두어

빛나는 햇살로 서로의 이마를 행구고

바람 서늘한 쪽으로 작은 길을 내어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사랑이 드나들게 하라

그대들의 집은 맑고 밝고 따뜻하여

오해와 불신과 절망 따위가 넘보지 못하리라


딸아 아들아


세상모든 것들의 이름을 신으로 불러 기도하노니

영원보다 더 오래도록 행복하시라

행복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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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없어지는 사람

취향 2018. 5. 28. 21:26

없어지는 사람

  

                                    이사라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데

내 눈앞에서 옆 사람이 없어지나요


없어지는 사람들이 가는

세상이

왜 나는 안 보이나요


없어지는 사람들은 뚜렷이 보이는데


오늘이 그렇게 가나요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은 두고

몸들이 없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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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취향 2018. 5. 28. 21:22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장석남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그것들과 나 사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무슨 길을 걸어서

새파란

새파란

새파란 미소는,

어디만큼 가시려는가

나는 따라갈 수 없는가

새벽 다섯시의 감포 바다

열 시의 등꽃 그늘

정오의 우물

두 세시의 소나기

미소는, 무덤가도 지나서 저

나와 나 사이

미소는,

저토록 새파란 수레 위를 앉아서


나와 그녀 사이 또는

나와 나사이

미소는, 돌을 만나면 돌에 스며서

과꽃을 만나면 과꽃의 일과로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개서

어디로 가시려는가

미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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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저녁의 소묘 4

취향 2018. 1. 2. 18:19

 저녁의 소묘 4

  

                                    한강


잊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

부스러질 것들


부스러질 혀와 입술

따뜻한 두 주먹


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 앉는 걸 지켜본다


무엇인가

반짝인다


반짝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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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파노라마 무한하게

취향 2018. 1. 2. 18:17

 파노라마 무한하게

  

                                    이제니


그날은 몹시도 눈이 내렸는데

내려앉는 눈송이를 볼 수 없는 높은 침상이었는데

침상 저 너머에서 알 수 없는 아리아가 울려 퍼지는 밤이었는데


죽기 직전 사람은 자신의 전 생이를 한눈에 다 본다고 하는데

그것은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속도로

무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움직임이라고 하는데


그때 보이지 않는 창 너머로 보았던 것은

언젠가 나를 위해 울어주었던 얼굴이었는데


걷고 묻고 달리고 울고 웃던

검은 옷 입은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있지도 않는 없는 사람을 떠올리며

없지도 않은 있는 사람을 지울 때


한 치의 여백도 없이 채우고 싶다고

더 없이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고


위에서 아래로 과거에서 미래로

아득히 흘러가던 그 풍경은 다 무엇이었을까


흙은 또 이토록 낮은 곳에 있어

무언가 돌아가기에 참으로 좋은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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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오늘의 철학

취향 2018. 1. 2. 18:14

 오늘의 철학

  

                                    김경미


친구는 내게 노출 드레스를 입힌 뒤

허리 안쪽을 옷핀으로 여며주고

겨드랑이 제모 상태를 확인한 뒤

뉴욕 뒷골목 클럽에 데려갔다

가는 내내 드레스 속 옷핀이 살갗에 차가웠으니


귀를 찢는 연주 소리와 춤과 술

나도 퇴폐와 환락을 좋아하지만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하지만


나는 슬픔 속에서 더 안전할 것이며

초라함이 일상의 무대의상일 것이며

발은 주로 한 박자 늦을 것이며

심장은 소규모를 떠나지 못할 것이며


이것은 내 옷이 아니며

이 사람은 내가 아니며

이 생은 내가 원하던 모습이 아니라고


허리 속에서 풀려버린 차가운 황금색 옷핀이

자꾸 살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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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연하장

취향 2018. 1. 2. 18:10

 연하장

  

                                    이생진


서독까지 250원

<근하신년>이라고 적힌 활자 밑에

이름 석 자 적는다

아직 살아있다는 신호등

네게 이르지 못한 불빛이

아직 꺼지지 않고 있다는 표시

해마다 눈 오는 12월

그때쯤에서 생각나는 사람

우표값이 250원

비행기표 값이 그렇게 싸다면

벌써 찾아갔지


올해도 <근하신년> 그 밑에

이름 석 자 적고

그날부터 잊기 시작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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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새벽에 들은 노래

취향 2018. 1. 2. 18:04

 새벽에 들은 노래 3

  

                                    한강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따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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