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ding Neverland, 2004

영화 2011. 10. 26. 21:21

 

첫번째 영화. <Finding Neverland>

  이 영화를 처음 만난 건 아마 2007년 4-5월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내 마음은 '몇달째 비'라는 신기록을 세우고 있었는데 웃기게도 그때의 나는 그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암시 중이었거든. '괜찮다'고. 이제와 솔직하게 털어놓는 거지만, 대학에 올라오고 자꾸만 사람을 잃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항상 불안했다. 힘들 때도, 즐거울 때도, 슬플 때도, 심심할 때도 '혼자'. 사실은 '혼자'인 것 보다 그에 자꾸만 익숙해져가는 나 자신이 더 무서웠다. 언젠가부터- 나도 대학생이고, 이제 어른이니까 남 앞에서 울거나 약한 소리 같은 건 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내면 괜찮아 질 거라고. 괜찮다고. 이러면서 어른이 되는거라고. 잘 하고 있다고. 매번 습관처럼 주문을 외웠지만, 그래도 역시 힘든 건 힘든 거다. 뭔가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마침 학교 도서관에서 영화 DVD를 빌려준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라- 내 발은 아무 생각 없이 도서관으로 움직였다. 막상 도착해서는 뭘 빌려봐야 할 지 한참을 방황했고 말이다. 그 때 갑자기 머릿속을 스친 배우가 조니뎁. 멀티미디어실 한쪽 구석에서 조니뎁 출연 영화를 포털에 검색해서 찾은 게 바로 이 <Finding Neverland>다. 다른 거 없이 정말 조니뎁 나온대서 봤다. '그가 나온다면 재밌겠지'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가면서 말이다. 장르가 뭔지,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고, 심지어는 꽤 눈에 익을 법한 'Neverland'라는 단어에도 반응하지 않은 채 그냥 빌려왔다. 방에 불도 다 끄고, 커텐도 다 치고, 침대 위에 노트북을 셋팅한 다음 누워서 터치패드를 손으로 비벼 DVD 재생버튼을 눌렀다.


     제임스 베리(조니 뎁)의 마음으로 보는 관객의 반응

  저 장면을 보면서 제임스가 정말 작가답다는 걸 실감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임스의 작가적 상상력을 잘 연출한 감독 등을 칭찬해야겠지만, 난 당시만 해도 영화를 그냥 '이야기' 자체로 받아들였다. 영화를 보면서 '만드는 사람'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요즘은 영화를 보면서 만드는 사람을 생각하느냐고? 아쉽지만 요즘도 그닥. 이전보다야 조금 생각하는 것 같지만서도 역시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해 영화에 이입하는 정도가 남들보다 "꽤" 강하다. 하하. 영화에 이입하는 정도가 강하다는 건 좋은거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지만- 영화 한 편보고 패닉에 걸려서 몇 주, 몇 달씩 고생하는 걸 보면 그런 말은 못할껄? 암튼간에- 저렇듯 비를 내리게 하고, 개를 곰으로 만들고, 정원을 황야로 만드는 영화적, 혹은 만화적 상상력은 정말이지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시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즐겁게 했다. '제대로 빌려왔구나- 유후-'

  다시 영화 얘길 좀 하자. 제임스는 나름 잘나가는 극작가인데, 기껏 준비했던 연극이 관객의 냉대를 받는 바람에 쉬면서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는 '현실' 보다는 '이상(혹은 상상)'에 기본을 두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의 아내는 지극히 '현실'적인 여자였다. 현실적인 게 꼭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던 것이다. 너무도 도도한 나머지 자신의 세계를 나누려는 남편의 시도조차 묵살시켜버리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홀로 공원에 산책을 가게되고, 그곳에서 피터와 그의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

  피터의 엄마와 제임스는 꽤 잘 어울렸다. 제임스가 지금의 아내와 이혼하고 그녀와 재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요즘에 와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두 사람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하하.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부모의 모습이 어떤 거냐구? 아이와 공감할 줄 아는 부모랄까. 가령 유치원도 안 간 내 딸아이가 "엄마, 달님이 날 따라와!"라고 했을 때 "그건 달이 널 따라오는 게 아니라 지구와 달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야" 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닌, "어머, 그건 왜 그럴까? 우리 ㅇㅇ이가 달님한테 사랑받고 있는 거 아냐? 좋겠네-" 라고 대답해 줄 수 있는 부모말이다. 뭐라고 잘 설명은 못 하겠지만 내 아이의 곱고 신선하고 이쁜 시선에 기꺼이 동참하는 부모가 되었음 좋겠다. 그게 억지로 맞춰 주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맞기를. 나도. 내 배우자가 될 사람도-

  잡소리 그만하고 피터들에게로 돌아가자. 피터의 형제들은 '어린이'답게 천친난만하고, 또 기발한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 그에 반해 피터는 뭐랄까.. 척 보기에도 뭔갈 꾹꾹 누르고 있는 아이처럼 보였다. 영화를 다시 보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피터는 '그때의 나'와 꽤 많이 닮아 있었던 것이다. 어른을 혐오하면서도 빨리 어른이 되기 위해 충분히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억지로 꾹꾹 누르는 그 모습이. 나도 남들이 보면 저랬을까. 하긴 별로 친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던 분들께서 개인적으로 불러다 챙겨주신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딱 저 꼴이었지 싶다. '나 지금 힘들어 죽겠어요' 라고 얼굴에 써붙이고 다니는 주제에 누구든 도와주려고 나서면 '당신은 뭐야?' 라며 삐딱하게 받아치고 마는 못된 성미.

     이것 좀 봐라, 너무 멋지구나. 이제 어린애 아니야.
     20초 동안. 언젠지 모르게 어른이 된 것 같구나.


  연극 <피터팬>의 준비가 착실히 되어가는 가운데, 피터 엄마의 병은 점점 깊어간다. 그 때 첫째인 조지가 엄마의 상태에 대해서 제임스에게 상담을 요청하는데- 그때 제임스는 조지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해 준다. 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던 것도 아마 저 즈음부터였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저 대사는 내게 전혀 다르게 들렸다. '어른이라고 아프지 않은 것이 아냐, 어른이라고 꼭 눈물을 참아야 하는 건 아냐, 어른이라고 힘든 소리 무조건 안하고 그러지 않아도 돼, 지금은 울어도 괜찮아'라고. 어떻게 저 대사가 그렇게 들렸을까. 영화를 잠시 멈추고 넋이 나갈 만큼 울었던 것 같다. 나 정말 많이 힘든데. 아무도 내 옆에 없는데. '괜찮아'라며 그제야 심장이 터질만큼 꽉 '안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달까.

  사실 안아주는 것 만큼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어필하는 일도 없다 싶다. 우리집은 타고난 경상도 집안 답게 가족간에 애정표현이라던가 칭찬이 드문 편인데- 부모님 계중에 따라나서면 다른 집과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단적인 예로 '단비아빠'라고 불리는 아빠 친구분께서는 내가 한참이나 자랐는데도 아직 나만 보면, 정확히는 계모임에 따라나온 아이들만 보면 '우리 ㅇㅇ이가 이만큼이나 컸네- 어디 한번 안아보자' 라고 하시며 정말 숨을 못 쉴 정도로 한참동안 안아 주시는 것이었다. 그맛에 부모님 계모임을 따라나갔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안겼을 때 '따뜻하다' 라는 느낌을 받았던 건 사실이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우리집에선 누구 생일이라고 케잌을 산 적이 한번도 없다. 하하. 찰밥에 미역국이면 됐지 뭘. 나야- 엄마아빠한테 매번 '생신축하합니다-' 란 말을 곧 잘했지만. 내 생일이라고 딱히 축하를 받아본 기억은 없다. 정말 과장하나 안 붙이고 딱 미역국이 끝.  '생일대우 받고싶음 조용히 있음 안되는구나'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어떻게 바꿨냐구? 생일되기 일주일도 전부터 집안에서 칭얼대기를 시작했다. '엄마 곧 큰 딸내미 생일인데 생일인데 생일인데' '아빠 딸내미 생일인데 케잌 케잌 케잌 케잌' 하하. 성과가 있었냐고? 물론이지. 그 후로 내 생일뿐 아니라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꼬박꼬박 케잌을 먹었고, 심지어는 내가 칭얼대지도 않았는데 내 대학합격발표 날과 우리 집 이사한 날, 아빠가 알아서 케잌을 사오셨다. 하하. 역시 집에는 딸내미가 있어야 한다니까. 칙칙한 남동생따위 백날을 같이 살아봐라, 집 공기 삭막하다고 애교떨어주나. 


     어린이들을 위한 25개의 떨어진 좌석

   사실, 영화를 처음 볼 때만 해도- 극장 중간중간에 25개의 떨어진 좌석을 마련해 어린이들을 앉히는 마케팅 전략 이라던가, 그뒤 영화 내용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만한게 그때의 난 운다고 정신이 없었다구. 어쨌거나 내노라 하는 판, 검사 분들께서 '요정이니- 인디언이 어쩌구' 하는 연극을 보고 반응 하겠냐는 극장주의 그럴듯한 핀잔에 제임스는 즉각적으로 대응한다. 바로 어린이들을 위한 25개의 각기 떨어진 좌석을 준비한 것. 여태까지 보여진 제임스의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딱히 어린이들을 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어쨌거나 '외부 자극'에 솔직한 어린아이들을 어른들 사이사이에 배치함으로써 어른들의 동심을 이끌어 내는데 대 성공을 거두었다.
 
  신기한 거 하나 알려줄까나. 연극 <피터팬> 내용 중에는 팅커벨이 피터팬의 독약을 마시고 대신 죽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팅커벨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연극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요정을 믿는 마음으로 박수를 쳐주면 된다. 그럼 희미해져가는 팅커벨의 빛이 강해지고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기한 건 뭐냐고? 극 <피터팬>이 시연된 당시부터 현재까지 팅커벨이 박수를 받지 못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만 해도 <피터팬>은 어린이 동화가 아니라 어른이 보는 정극이었는데 말이다.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 부터 귀족, 판검사, 세상에 찌들대로 찌든 어른들이 그 장면 만큼은 한 마음이 되어 팅커벨을 위해 박수를 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하하. 세상사가 힘드니, 어둠에 찌들었니 해도 다들 마음 한컨에 조그만 촛불 하나씩은 켜고 사는구나 싶지않은가? 아 생각만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


     우린 가끔 그런 척 행동했었죠. 당신이 우리 가족이라고, 안 그래요?
     당신이 제게로 와서 많은 걸 해결해줬어요.
     이젠.. 그게 사실이 아닌 건 아무 상관이 없게 됐죠.
     그게 사실이 아닐지라도. 그게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전 계속 그런 척 하고 살아갈래요. 죽는날까지. 당신과 함께.


  자자. 이쯤에서 깔끔하게 정리되어야 할 것이 제임스의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이 아닐까? 다들 예상했을진 모르겠지만. 결국 제임스와 그의 아내는 이혼을 한다. 이혼이 다가올 즈음 그녀의 행동을 보면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제임스를 꽤 사랑했다는 것과, 그의 세계를 공유할 생각도 잠깐 했었다는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타이밍을 놓쳐버린 걸. 게다가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해봤자- 솔직히 자기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니, 처음에 산책 가자고 할 때 같이 가줬음 이럴 일이 없잖아. 아니면 그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들어주려 노력이라도 해 보던가. 왜 다른 여자에게 그의 아픈 어린시절, 그의 네버랜드를 들을 기회를 주냔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부면서 각방은 왜 써?
 
  '아무리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고, 꼴도 보기싫니 어쩌니 해도 각방은 절대 안된다' 는 건 우리 부모님 철학이지만, 저건 나도 꽤 공감하는 거라구. 싸웠다고, 지금 당장 얼굴보기 싫다고 피하기 시작하면 골은 깊어지기만 할 뿐이라는 걸 왜 몰라. 아, 싸우든 욕을 하든 자꾸 부대끼면서 맞춰가야 될 거 아냐. 그래서 나는 뭐가 맘에 안드는 지,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아무 말도 안하고 꽁해있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아, 또 갑자기 혈압이.. 어쨌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그게 친구든, 애인이든, 부부든 뭐든 적어도 무언가 '관계성'을 가진 사이라면 '이런 점은 이러저러 해서 싫다. 이렇게이렇게 해줬음 좋겠다'는 식으로 서로서로 맞춰가는 정도의 애정은 갖춰주라고.
 
  흠냐, 너무 흥분했나. 이제 그의 새로운 여자. 피터네 엄마 얘기로 넘어가자. 그녀는 연극 시연날 몸져 눕고만다. 연극이 상연되는 동안 제임스는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정확히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거지만 말이지. 아아- 여자가 고백하게 가만 냅두다니. 니가 그러고도 남자냐! 고백 정도는 남자가 먼저 하란 말이다! 음- 어쨌거나 그녀는 네버랜드에 꼭 가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 안 될 것 같다며. 조만간에 가볼 수 있지 않겠냐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가고 잠에 든다. 다음 날- 혹은 며칠 후 쯤으로 보이는 어느 날- 그녀는 눈을 뜨고 제임스를 찾지만 그가 연극에 성공하고 바빠서인지 집에 오지 않는다는 얘기를 어머니에게 전해 듣고는 심란해한다. 그 때 피터들이 방으로 들어와 어머니께 보여드릴 게 있다며 의사를 설득하고, 그녀는 아들들의 부축을 받으며 1층으로 내려오는데- 다들 예상하다시피 그 곳에는 제임스가 있다. 피터들과 짜고 집 1층을 극장으로 꾸며놓은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제 그곳에서 그녀의 가족만을 위한. 아니 그녀 단 한 사람를 위한 연극이 시작된다.


      엄마가 보여요.

  으응, 그녀는 얼마 후 정말로 네버랜드에 간다. 글쎄, 아직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그런 불행한 일이 없어서 실감은 안 나지만. 역시 돌아가시게 되면 '엄마는 내가 있는 곳 어디든지 있으며, 믿기만 하면 언제든지 엄마를 볼 수 있다' 라는 위로 따위는 귀에 들리지도 않을 만큼 아프고, 또 슬플 것이다. 그 말이 틀렸다던가, 거짓말이라는 말이 하고싶은 게 아니라 저 당시에는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는 거지. 뭐, 피터는 받아들였으니 무효. 라고 말하면 사실 할말은 없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혹은 날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내 옆에 있다' 는 주의니까 말이지. 그들은 늘 내 옆에 있으면서 매순간마다 나와 대화를 시도하는 걸. 단지 평소에는 그 소리를 잡아내지 못할 뿐.
 
 
 
ps.
  암튼, 이게 바로 내 귀가 찢어져라 소리를 질러댄 유일한 영화란 말이지. 정말 소중한 것은 말로 잘 엮여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리뷰네. 하하. 사실 피터가 엄마와 제임스 앞에서 자신이 처음 쓴 극 대본을 갈갈이 찢어놓으며 화를 내는 장면이나, 어른들은 맨날 거짓말만 한다고 제임스에게 따지는 장면, 30초간 어른이 되었다는 그 세 장면에 대해서 자세히 쓸 마음으로 리뷰를 시작했는데- 결국 쓴 건 30초간 어른이 되었다는 그 장면 뿐이란 말이지. 핑계아닌 핑계를 대자면, 지금 마음이 그때와 같지 않은데 괜히 옛 감정 그대로 쓰려고 노력하면- 글이 가식적이 될 것 같아서- 랄까? 아하하핫. 덕분에 과거 기억인 '어른이 어쩌구에서 울었던 것'과 현재 관심사인 '이상적인 결혼'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이도저도 안한 글이 되어버렸군. 역시 처음에 딱 봤을 때 못 쓸 바에야 안 써야 되는 건데- 역시 안 쓰고 그냥 넘어가기엔 그때의 내가, 그리고 이 영화가 너무 소중해서 말야- 풉.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Great Gatsby, 2013  (0) 2014.06.15
Les Miserables, 2012  (0) 2013.02.02
시라노 ; 연애조작단, 2010  (0) 2012.06.12
사랑을 놓치다, 2006  (0) 2012.04.29
ただ、君を愛してる, 2006  (0) 2011.10.31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