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메이트

생각 2018. 7. 31. 17:44

  지난해의 끝자락. 전화가 왔다. 내 오랜 룸메이트였다. 근 3년을 가까이 붙어살았는데 정작 학교를 나오고선 일년에 한두번 안부나 나눌 뿐 얼굴을 보는 일은 없었다. 일단 거리가 멀었고 그간 서로가 먹은 나이도 적지 않으니 삶이 벌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여태 애틋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건 나 뿐일지도 모르지. 먼 곳에서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것만도 좋은일이야.' 그렇게 핑계를 대며 머뭇거리던 내게 룸메가 먼저 다정하게 다가와주었다. "룸메야." 부르고 나니 입술 끝에서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 오랜만이구나. 실감이 났다.


  룸메를 떠올릴 때면 삶을 함께하는 것에 대한 무게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전공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학교에서 만났으면 아마 단대에서 오며가며 한번쯤 봤나 싶은 사람으로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채 졸업을 맞았을 것이다. 그런 관계가 여즉 이리도 애틋하게 남아있다는 건 역시 함께 살았어서 그런 거겠지. 이건 정말 그 외에 다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친구도 연인도 부모형제와도 다른 남. 그런 사람과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고 어쩌면 밥도 같이 먹고. 언제 씻는지. 연인과 통화할 때는 어떤지. 친구와 있을때는 어떤지. 어떤 술을 좋아하고 어떤 드라마를 보는지. 또 어떤 생을 살아왔는지. 한번도 궁금해본적 없는 세계가 밀물처럼 몰려온다. 함께 산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이제 우리는 각자 다른 룸메이트를 만나 평생을 살아가겠지만 대학시절, 널 만날 수 있어 좋았아. 덕분에 많이 배웠어. 각자지만 또 같이. 우리 잘 살자. 오래오래 행복하렴 룸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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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생각 2018. 7. 21. 08:05

  꿈을 꿨어. 몇번째인지는 기억나지 않아. 그냥 그러고 며칠 밤이 지나고서 네가 내게 연락했다는 걸 알게됐고 그순간 내 오랜 일기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어. 역시 그걸 네게 줘버릴까. 그때는 잘 모르겠더라고. 처음 그 일기를 발견한 날은 뭔가 마음이 따땃하니 좋았는데 여태 그 일기를 두고 네게 줄까 말까 망설이던 건 역시 주기엔 어딘가 미온적어 그랬겠지. 그래. 한때는 이 미적지근한 마음의 온도를 정확히 알고싶어 찝찝하던 시절도 있었어. 근데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온도인지, 너와 나는 지금 어디쯤 와있는지 더는 궁금하지도 않는 때가 오더라. 최근에 인터넷에서 그런 글을 봤어. 어떤 오해는 앞으로 이해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랑 비슷하다고. 그래. 그런건가봐. 내가 그때 어떤 생각을 했건, 네가 그때 어떤 생각을 했건,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되었건. 이제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이제 나의 오해는 여기 묻을께. 너도 더 이상 나를 궁금해하지 말고 너의 삶을 살길 바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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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생각 2018. 3. 19. 19:15

  연극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 길,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빗방울이 굵긴 했지만 뭐, 이정도 쯤이야. 마침 가방에 젖으면 안될 물건도 없었고. 내 엠피삼은 원체 건장하시니. 휴대폰 정도만 점퍼 안 주머니에 잘 넣고 걸으면 기숙사까지는 괜찮을 것도 같았다. 으쌰! 그럼 오랜만에 비나 한번 맞아 볼까나―

조금은 후련한 발걸음으로, 특별히 뛰거나 머리 위를 가리지도 않고서, 용감히, 터덜터덜. 그렇게 3분쯤 걸었을까. 조장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밖에 비오는데 우산 있어?"

  "여기 학관 앞이요! 근데 괜찮아요! 금방 가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더 가지말고 거기 비좀 피하면서 있어. 사람 보낼께"

  "아? 아니에요! 저 어차피 젖어가지고!! 진짜 괜찮ㅇ...."

 

뚜―뚜―

 

  으으. 정말 괜찮은데. 뭐, 왔어도 나 없으면 알아서 가겠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다시 터덜터덜.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지난 일을 곱씹으며 이런저런 감상에 빠질때쯤 머리 뒤쪽으로부터 불쑥 낯선 우산이 씌워졌다.

 

  "가지말고 있으라니까요"

 

  부조장이었다. 거친 숨이며 바짓단이며 영락없이 뛰어온 모양새였다.

 

  "어디까지 가요? 데려다 줄께요"

  "아, 저 4생이요. 근데 괜찮아요. 어차피 다 젖었고. 그냥 가던길 가셔도 돼요."

  "저도 어차피 그쪽으로가요. 같이써요"

  "....."

  "....."

  "아니 저, 진짜 비 맞는거 좋아해요. 진짜 가셔도 돼요."

  "저도 좋아하는데요, 감기걸려요. 같이 써요."

 

 

 

  그랬다. 

당신 말대로.

썩 괜찮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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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생각 2017. 11. 7. 10:39

  가아끔, 우리 마지막 날이 생각나.


  그날 유난히 예쁘던 나는 무슨 영화를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불안하고 또 초초했어. 날 옆에 앉혀놓고 전화며 카톡을 계속하던 너의 말엔 군더더기가 많았고 애써 숨긴 눈빛 너머엔 다른 아이가 있었어. 너는 계속 휴대폰의 시계를 확인해.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둥, 이제는 지갑을 비우겠다는 둥 갑자기 묻지도 않은 네 인생계획을 웅얼거려. '나와는 수십번의 각서를 쓰고도 고치지 못한 습관이 네 눈빛 너머의 그 아이를 위해선 그렇게 쉬운 일이었니?' 한번쯤 쏘아대고도 싶었지만 나직히 잘 됐으면 좋겠다. 뱉고 말았지. 물론 진심이었어. 뭐, 그렇다고 아프지 않았단 건 아니고.


  우리의 수 많은 마지막 날 중에 나는 그날이 정말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몇 번을 다시 마주해도 그날의 마음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 수십번 쌓아올리고 백번도 넘게 매어붙인 마음이 산산히 조각났어. 너의 그 아무것도 아닌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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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생각 2017. 11. 7. 10:33

  한희정의 앨범엔 처음보는 아파트 옥상의 풍경이, 그날의 바람이, 눈물이, 고백이 있다. 나의 시린 순간은 노래에 박제되어 나는 이렇듯 볕 좋은 날에도 문득 옷깃을 여미고야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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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는다는_것은으로_시작하는_글쓰기

생각 2017. 11. 7. 10:25

  잃는다는 것은, 당신을 잃는다는 것은. 못내 그리운 날, 뼈에 사무치도록 앓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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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생각 2017. 6. 4. 02:02

  요전번에 엄마가 아팠다. 친한 몇에게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긴 했지만, 누구 하나 우리 엄마를 깊이 걱정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엄마는 어디까지나 "우리" 엄마니까. 누군가 마음을 쓰고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했을 것이다. 아무렴, 딸인 나조차 수술방 앞에서 눈물 한 방울 없이 멍한데.


  하루종일 엄마를 살피다 저녁께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제일 먼저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끽해봐야 하루종일 카톡으로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 것 뿐인데도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주던 당신은 수술 후 의사 소견까지 재차 듣고나서야 안심하는 듯 했다. 잘됐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런 얘기가 오가고 분위기가 조금 풀렸을까.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도로롱.


  당신 코고는 소리. 웃음이 났다. 우리 엄마 걱정을 많이했구나. 내 걱정과 불안이 거기에도 가 있었구나.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에 얼른 깨워 우쭈쭈 한 뒤 다시 재웠다. 전화를 끊고 누워 나도 잠을 청해보려니 어딘가 가슴 한켠에서부터 온기가 퍼지는 것 같다.


아아. 당신이 내 가족이구나.

"우리"엄마가, 우리 엄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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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니스

생각 2017. 2. 20. 22:55

  우리는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프랑스에 도착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거리를 쏘다니며 마카롱 가게를 구경하기도 하고, 작은 그릇 집도 들렀다. 둘다 할 줄 아는 프랑스어라고는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가 전부라 구경이 구매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역시 공부를 좀 해야 했을까나. 그래도 즐거우니 되었다. 그렇게 붐비는 거리를 지나 꿈의 니스로 가는 길, 계단 아래쪽에서 누군가 내 치마를 잡아 끌었다. 뭐지 하고 뒤돌아 보는 순간 팔을 잡히어 순식간에 끌어내려지는데 앞서 걷던 그가 사태를 빨리 파악하고서 내가 끌려 내려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었다. 항상 자신보다 나를 먼저 챙기는 사람이라 어찌저찌 나는 올라올 수 있었는데 이번엔 그가 끌려 내려가게 되었다. 이대로 우리는 타국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걸까. 그를 끌어올려야 하는 내 팔힘은 점점 약해져만 가고. 그의 손을 놓고 대사관이든 경찰서든 어디로든 도망치라는. 그 후에 다시 찾으라는. 그런 말을 먼저 뱉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역시 나였을까. 어쨌건 우리는 서로 울며 손을 놓았고 내가 긴 계단 끝 경찰서를 발견 했을 무렵엔 어떻게든 도망쳐 나온 그가 내 옆에 있었다. 홀리듯 들어간 경찰서에서 나는 그가 어찌 도망쳐 나왔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손을 놓은 순간을 언급하며 우리가 한 결정이 잘한 것이라는 걸 머리론 알고 있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며 다시 울었다. 나는 미안하고 아픈 마음에 같이 울었다. 30여분이 지났을까. 진정한 우리에게 경찰관이 오늘은 호텔로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고 얘기했지만 우리는 아니라며 경찰서를 나와 니스를 향해 걸었다. 걷는 동안 손도 마주잡지 않고 무언가 대화를 나눈다기엔 뚝뚝 끊어져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림에도 우리는 계속 함께 걸었다. 



  잠에서 깨어 한참동안 생각해봤어요.

  왜 우리는 호텔이 아닌 니스로 계속 갔을까.

  그러다 이내 그게 잘한 결정임을 깨달아요.


  잡은 손을 잠시 놓기도, 싸우기도, 불안에 울기도 할 지언정

  함께 걷는 걸음을 포기하지 말아요.

  우리 앞으로도 쭉 같이 걸어요.


  같이가요.

  우리만의 니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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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를 열쇠나 자물쇠로 비교해보자

생각 2016. 12. 18. 21:24

  쬐깐하고 어딘지 통통 튀는 열쇠로 자물쇠를 찾기보단 아무 상자나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마음에 드는 상자를 찾으면 일단 들어간 뒤 한숨 자는 경향이 있음. 머리의 리본 장식이 특징!


  엔틱한 네모 모양의 자물쇠로 쉬는 날이면 세탁기가 돌아가는 걸 구경하거나 레고라는 이름의 블럭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한다. 최근엔 통통튀는 열쇠를 만나 어쩔 줄 모르는 듯.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묵직함이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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ヒロイン

생각 2016. 10. 15. 19:28

  '눈이 와, 첫 눈이야.'

 

  이 일곱 글자를 지웠다 다시 쓰길 열 세번. 완성된 글자를 쥐고서도 백하고 여든 다섯 걸음을 더 걸었어. 차가운 공기에 코끝이 시려. 사실 날씨 얘길 따윌 하고싶은 게 아니었는데. 오늘, 만나지 않을래. 이런 말은 아무래도 안쪽으로 삼키게 되니까 말야. 지금 마음만큼이나 빠알간 코를 하고서 허공에 고백을 해. 보고싶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한숨처럼 내뱉는 이 마음을 언제쯤 네게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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