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하루, 2016

영화 2017. 2. 6. 03:18


  여덟번째 영화, <최악의 하루>

 

  실로 근 일년만에 여유를 찾은 남자친구와 장거리 데이트 중, 무슨 영화를 함께 볼까 고민하다 우연히 "우디 앨런이 홍상수 영화를 보고나서 서울에서 찍은 영화 같다" 는 누군가의 평을 읽고는 '아, 이걸 볼까' 싶었는데 마침 남자친구도 예전부터 보고싶었던 영화라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후후. 넘나 잘된 것. 여느 때와 같이 5. 4. 3. 2. 1 카운트를 하고는 잠잠히.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제가.. 여길 잘 몰라서...

才夫才夫です

Sorry !


  은희. 배우지망생. 의미를 알 수 없던 연극 대사를 처음으로 얼굴을 보인 그녀는 볼수록 사랑스러웠고, 여러가지 의미로 내가 생각나는 그런 여자였다. 좋게 말해 통통, 나쁘게 말해 쾅쾅 기분따라 걷는 그 걸음걸이라든가, 외국어도 길찾기도 잘하는 거 하나 없으면서 그냥 내키는대로 도와줘버리는 성정이라든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위인 것 처럼 행동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약자는 저라든가. 아, 물론 입고 다니는 옷도 빼놓을 수 없지. 빈티지 원피스에 야상 대강 걸치고서 구두는 아무래도 발 아프니까 워커로. 그래도 역시 제일 닮은 건 '본인 욕망에 솔직하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결코 좋은 의미만은 아니지만.



야, 너 아직도 만나고 있었냐?

뭘 만나...

은희씨 누구에요? 응?

몰라요...

하, 몰라요?


  대학을 졸업하고 기인 연애를 청산한 뒤 지독스럽게 물렁한 나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했고. 조금 더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려 몇년간 꾸준히 정진한 결과 어디가서 썅년 소리는 안 듣더라도 꽤 이기적인 캐릭터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그 채로 몇 년 더 두었했더라면 지금의 은희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본인 욕망에 솔직하다는 건 여러모로 편하다. 누군가에게 피해만 안 끼친다면 꾸준히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달까. 하지만 살다보면 내 욕망과 타인의 감정이 부딪치는 순간이 분명 히 오고, 계속 내 욕망에만 따르며 살다보면 그런 순간에 타인을 배려하는 방법을 잊게된다. 어디까지 혹은 언제까지 솔직할 것인가. 선을 정해두지 않으면 결국 내가 다칠 뿐이다.


  은희는 최악의 하루를 멈출 수 있었던 순간이 한번, 두번, 아니 몇번쯤 더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본인 욕망에 가장 솔직한 선택을 했고 이는 쌓이고 쌓여 오후께의 볕이 짙은 남산에서 '빵' 터지고 만다. 이때 나는 은희가 안타깝지도 불쌍하지도 그렇다고 고소하지도 않았는데 아마 그건 은희가 보통사람이었기 때문이지 싶다. 거짓말도 하고 착한일도 하고 인간관계에서 실망도 하고 상처도 주는 그냥 보통사람. 그냥 우리. 그냥 나.



긴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쪽이 저한테 뭘 원하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에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커피 좋아해요? 전 커피 좋아해요. 진하게.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선. 


  솔직하다는 것은 언어적 비언어적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과, 본인(감정 및 욕망)에 솔직한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아니. 적어도 나는 언제가부터 그렇게 둘로 나누게 되었다. 이런 정의 구분은 한번 하기가 힘들지 일단 하기만 하면 그 뒤로 헷갈리거나 실수하는 일은 없다. 솔직하여 최악의 하루를 맞은 주인공을 보며 '솔직한게 나빠?', '왜 나빠?', '어디가 나빠?' 질문하지 않았다. 저 질문 고리의 답을 이젠 아니까. 어쩌면 나는 한뼘쯤 성장했을까.



I was a dancer                 무용을 했었어요

Oh, really?                      오, 정말요?

Yeap                            

So beautiful                    아름답네요

Thank you                       고마워요

I talk with my body              몸으로 말을 하는 거랄까?


  이순간 은희는 '솔직하게 욕망하는 나'가 아닌 '솔직한 나'가 된다. 예쁘다. 직업이 거짓이라는 사람 둘이 솔직하여 반짝반짝 빛이 난다. "Happy Ending" 이다.




+ 번외 +





계절마다 다 재미가 있잖아요. 

다른 계절도 좋을 거에요. 

계절마다 둘러봐요. 내가 노력할테니까.

노력이 필요한 일이에요?

아니요. 음... 제가 뭐 건설적인 말 잘 못하는데... 

그냥. 그냥 한 길로만 걸어가기만 하면 돼요. 같이. 한쪽 방향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돼. 나 믿고 따라와줘요. 

응철씨.

키스해줘요.


  고백의 순간이 멋있기는 쉽지 않다. 대본도 없거니와 Save/Load도 없으니까. 두번 다시 없는 순간에 마음 가장 깊숙히 박혀있는 말을 꺼내어 전해야 한다. 어쩌면 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덜덜 떨기도 할 것이고, 어쩌면 준비해온 것의 반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고, 어쩌면 본인 감정에 너무 취하여 받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지 못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당신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슬쩍 가져와 그럴싸하게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언어이기 때문에. '정말 예쁘시네요' 에서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더 많은 순간. 당신이라는 하나의 결로 이어지는 문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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