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unger Games, Until 2014.

영화 2015. 3. 23. 12:56

 

  일곱번째 영화, <The Hunger Games>

 

  <The Hunger Games, 2012>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내게 있어 헝거 게임이란 '배틀로얄의 아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흥미는 꽤 동했지만 그뿐이랄까. 내 시간을 할애하여 보고싶은 정도의 영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땡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물쩡 넘어갔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The Hunger Game: Catching Fire, 2013>가 개봉하여 예고를 보는데 눈에서 불꽃이 튀더라. 그때 '이건 무조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존에 개봉했던 것을 본 건 물론이고 책까지 전부 읽었다. 지금은 <The Hunger Game: Mockingjay, 2014>까지 전부 보고도 4달이나 지난 상태. 처음엔 영화 완결까지 나오는 걸 보고 글을 쓰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대로 올해 part 2가 개봉할 때까지 기다리다간 정말 답이 없을 것 같아 시간을 내어 이렇게 떠듬떠듬이나마 시작해본다. 부디 개판은 아니길. 또, 스러져가는 이 마음의 반절이나마 여기 매어둘 수 있길.


 

신사숙녀 여러분 큰 박수로 맞이합시다. 불타는 소녀. 작년 헝거게임의 우승자. 캣니스 에버딘

 

  아아. 캣니스 에버딘. 불타는 소녀. 긴 시리즈의 초반, 아니 중후반을 달려가는 지금까지도 영화 내에서 그녀가 주체적으로 하는 일이란 단언컨대 분노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생각인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체제 전복따위 알지도, 바라지도, 꿈꾸지도 않으며 노련미가 넘치는 정치적 주체들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일 뿐이다. 매 순간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본인 행동에 책임지는 일 하나도 깔끔하게 해내지 못하는 그녀. 그 미숙함이, 치열함이 사랑스럽다.

 

  그녀는 감정문제에 있어서도 서툴기는 마찬가지이다. 하긴, 처음부터 자기 마음이 사랑인 줄 알았던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느냐만은. 허허. 게일이나 피타에 대한 캣니스의 감정은 몇가지 단어로 쉽게 표현 가능하다. 연민, 동질감, 약간의 애정, 그리고 미안함. 감정의 문제에서 어디까지는 사랑이고 어디까지는 사랑이 아니라고 확정지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그녀의 서툰 사랑방식에 뭇 남성들이 본의 아닌 상처를 받는 것 같지만 난 모르겠다. 과장 좀 보태서 '솔직하고 좋은데 왜?' 싶기도 하다. 누가 별을 따달래 달을 따달래. 좀 살아보자는 그 마음이 어때서.

 

 

헝거게임에서 우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녀가 만나줄 거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말씀은 고맙지만 그럴 일은 없을거에요. 그녀는 저랑 같이 왔거든요.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그녀인 남자. 피터 멜라크. 헤이미치의 말마따나, 캣니스는 백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피타에게 아깝다. 그는 그만큼 헌신적이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피타는 정말 자기 마음이나 몸 따위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 오로지 캣니스 위주로 움직인다. 그녀의 행동에 매번 마음을 다치면서도 그녀를 미워하지도 탓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본인을 내던져 지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피타는 늘 알 수 없는 남자였는데 왜 그런가 곰곰히 생각하면서 영화를 다시 봤더니 모든 이야기가 지독히도 삐딱하고 의심많은 캣니스 시점에서 진행되고 있더라. 하하. 물론 내가 누군가의 감정을 살뜰히 챙길만큼 섬세한 인간이 아닌 것도 함정.

 

  언제였더라. 한참 읽고있던 책장을 덮으며 그 당시 남자친구에게 '피타는, 널 닮았어'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는 피타는 고사하고 헝거게임도 몰라서 '좋은 사람이야?' 라고 되물었는데 '응' 이라고 대답하면서 참 많이 아팠었다. 네가 자각하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감히 하나하나 나열할 수 없을만큼 귀한 사랑을 내가 지금 받고 있단 말을 그에게 차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픈 줄도 모르는 그 생채기들이 언제 너를 괴롭히고 우릴 찢어놓을지 불안하다는 말을 끝끝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개봉할 Part 2에서 피타는 그간 보여주었던 '지고지순 첫사랑' 이나, '마왕의 성으로 잡혀간 공주님' 역할에서 벗어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될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억눌러온 상처들이 영화에선 어떻게 발현될까.

  

 

모든 구역은 캐피톨에게 자원을 보급합니다. 심장을 향하는 혈액처럼 말이지요.

대신 캐피톨은 질서와 안전을 보장합니다. 일하지 않는 것은 전체 시스템을 위협하는 짓입니다.

캐피톨은 판엠의 심장입니다. 심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이들이 사는 세계은 그야말로 현실의 불합리가 극대화 된 곳. 12구역이다. (방사능을 도맡아하는 구역 13은 사라졌다고 가정한다. 실은 벙커에서 체제전복을 준비하고 있지만) 이 열 두개의 구역은 각기 특화된 산업으로 캐피톨을 먹여살리지만 해당 지역구역민은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심지어 그나마도 분화되어 1구역에 가까워질 수록 캐피톨 친화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물론 대우도 낫고. 하하. 이 얼마나 고도로 설계된 세계인가. 왜 이때까지 혁명이 일어날 수 없었는지 알만하다. 각 구역을 계층적으로 분화되어 피지배계층끼리 상호 동질감이 생길 수 없도록 하는 동시에 틈만 나면 미디어에서 단합이란 없으며 일시적으로 뭉치더라도 종내에는 누군가 배신하여 한 명만 살아남는 컨텐츠를 지속적으로 보여주는데 그 누가 반란을 꿈꿀 수 있으랴. 결국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지금 이 체제에 숨죽이고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는 것만 머릿속에 남지 않을까.

 

  단결 없는 혁명은 없다. 내 옆사람 뿐 아니라 내 옆사람 사돈의 팔촌까지도 함께 안고 가야하는 게 혁명이다. 왜 맑스가 항상 얘기하잖아.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아. 젠장. 모처럼 쉬는 날인데 또 회사 생각이 난다. 작년 일기에서 얘기했다시피 우리회사는 그야말로 민주주의를 거꾸로 타는 보일러 수준인데- 회사를 다니는 거의 모든 노동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대우가 조금도 나아지고 있지 않다. 이유는 단결을 하지 않으니까. 할 수 없으니까. 회사를 막 들어왔을 때는 다같이 파업이라도 하란말야!! 소리치고 다녔지만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세상 일이 그렇다. 각자가 사정이란 게 있는데 핏덩이같은 꼬마가 왈가왈부 할 수 없잖아. 그냥 곪아 터져서 결국에 이대로 살다가는 정말 아무도 버틸 수 없는 지경이 와야 바뀌겠지. 그 전에 애쓰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지지하지만 솔직히 나도 기대를 놓은지 오래다. 규모가 커서 쉽게 망하진 않겠지만 아마 10년에서 15년쯤 지나면 완전 중소기업 수준으로 망하겠지. 난 그전에 이 바닥을 떠야겠다. 이 나라를 뜨면 더 좋고.

 

  내 글이 늘 그렇듯 얘기가 또 샜는데, 그럼 12구역 말고 캐피톨은 어떤가 하면- 그야말로 향락과 사치의 중심지이다. 사람들의 죽음조차 그들에겐 하나의 컨텐츠일 뿐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왜 이런 걸 하는지 알 필요도 알 마음도 없으며 순진하게 누군가가 보여주는 세상을 믿고 산다. 자신이 지지하는 조공자가 죽는 건 안타깝지만 그거야 뭐 또 새로운 컨텐츠가 나오면 금방 잊혀질 감정이고, 그 외 다른 어떤 사람이 언제 어디서 왜 죽어가는지엔 차가울 만큼 관심이 없는 도시. 어떻게 보면 순수. 다르게 말하면 무지 그 자체. 캐피톨 시민도 어떻게보면 스노우 정책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지만. 글쎄. 나는 모르는 것이, 관심 없는 것이 죄가 되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지금 내가 누리는 지위와 문화가 누구의 시체를 밟고 누리는 것인지 좀 알기를. 항상 깨어있기를. 나 뿐 아니라 남도 챙기는 우리가 되기를. 아아. 말만 쉽다. 이런 생각 조차 영화를 볼 때만 하는데 대체 내가 캐피톨 주민과 다를게 뭐지.

 

 

안녕 Mockingjay, Part 2에서 다시 만나

 

  이 판타지 세계는 지금껏 보아온 어떤 세계보다 현실적이다. 캐피톨 시민이나, 스노우 뿐 아니라 현재의 부당한 체제를 전복하려는 세력조차 선/악 의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점이 가장 그러하다. 13구역의 공화당세력을 보자. 고도로 계산된 프로파간다를 만들고 뿌리는 것도 물론 억 소리 나게 무섭지만 단결력을 해칠만한 아주 작은 요인조차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이 제일 무섭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당연한 것도 신경에 거슬린다. 현실이 이만큼이나 불합리한데 분명히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에 대항해 싸우는 공화당을 이상화하거나 지향해야 할 가치로 두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불길한 예감이 하나 하나 맞아들어갈 때의 소름을 잊을 수가 없다. 결국 이 세상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대의를 주장하며 모두를 지켜줄 영웅도, 지고지순한 사랑도 없다는 거겠지. 살아남는 소시민이 있을 뿐.

 

  그런 순간이 있다. 영화를 통해서 사람이 다시 보이고, 사람을 통해서 영화가 다시 보이는 순간. 굳이 사람이라 한정짓지 않아도 좋다. 세상 속에서 영화를 보고 영화 속에서 세상을 본다. 영화 한 편에 말 그대로 세계가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단 한번이라도 그 순간을 느끼게 되면 삶에서 영화를 놓을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Ps.

  아무리 써도 안 된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인 것 같다. 이 얘기도 저 얘기도 다 쓰고 싶고 할 말이 너무 많다. 영화가 좋기도 '너무' 좋거니와. 잘 써보고 싶단 마음이 커서 더 그런 것 같다. 한 글에 오래 매달릴 시간이 없는 건 보너스. 하하. 진심 여기까지가 한계다. 기량부족. 뒤죽박죽일지언정 하고싶은 말은 다 했으니 (사진은 죄다 맘에 안든다. 젠장. 특히 마지막꺼. 왜 실컷 만들어놓은 GIF 안올라가냐) 먼 훗날 다시 정리하게 되더라도 일단은 이대로 업로드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애다큐, 2014  (0) 2017.08.21
최악의 하루, 2016  (0) 2017.02.06
The Great Gatsby, 2013  (0) 2014.06.15
Les Miserables, 2012  (0) 2013.02.02
시라노 ; 연애조작단, 2010  (0) 2012.06.12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