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 연애조작단, 2010

영화 2012. 6. 12. 22:03

네번째 영화, <시라노 ; 연애조작단>

  딱히 뭐랄 이유도 없이 갑자기 땡기는 것들이 있다. 비단 영화 뿐만이 아니라 책, 노래, 기타 등등 훨씬 많지 뭐. 보통때의 나는 그렇게 급작스런 땡김 보다 귀찮음이 더 강한 인간이라 대게는 '어?' 하고 잠깐 멈칫했다가 이냥저냥 그 상황을 넘기게 되는데, 우울할 때라든가  심적으로 힘들 때의 나는 땡기는 대로 그냥 해치워 버린다. 영화가 땡기면 영화를 보고, 책이 땡기면 그 자리에서 책을 사버리고, 노래도 질릴 때까지 그 한곡만 계속 듣고.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가슴이 세게 한대 맞은 것 처럼 퍽 아프다. '아아, 그래서 내가 이걸 골랐구나' 그런 생각. 

  시라노는 그런 영화였다. 이상하게 계속 땡겼다. 오며가며 영화 포스터를 볼 때마다 '아 그래 저거 보고싶다' 생각하고는 귀찮다고 미루고, 까먹고, 생각나면 또 미루고, 까먹고의 무한 반복. 그러다가 난 여차저차한 이유로 한참 잘 만나던 남자친구랑 헤어지게 됐고, 힘드네 자시네 하며 여기서 5시간이나 떨어져있는 본가까지 내려가서는 '그래 이제는 좀 보자' 하며 영화관엘 들어갔다.


당신의 사랑을 이뤄 드립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2010년에 이 영화를 처음 봤으니, 이 영화를 본지 벌써 2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원작이 되는 <시라노>를 보지 못했다. 보자, 보자 한지가 벌써 2년이라니 역시 평상시의 나는 꽤 게으른 모양이다. 사실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경우도 1학년 때 교양수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극이었는데 '보자 보자' 한지 4년만에 봤다. 하하. 시라노도 2년 후쯤 볼 수 있게 되려나. 암튼 <시라노 ; 연애조작단>은 원작을 너무도 연출하고 싶은 연출단의 부업으로써, 원작에 충실해 남의 연애를 돕는 그런 작품이다. 초반에 나오는 송새벽&류현경 커플 성사시키기를 통해 그들의 진가를 각자 확인해보시길.

  메인 스토리는 한 남자가 의뢰를 하러 연애조작단 기지에 방문하면서 시작되는데, 의뢰주가 그렇게 그리고 바라고 원해 마지않는 그녀는 알고보면 연애조작단장의 전 애인이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고? 하하. 영화라서 그런거지 무얼. 별로 내키지도 않는 의뢰를 떠맡은 연애조작단장은 그 의뢰를 열심히 성사시키기도, 그렇다고 완벽하게 방해하지도 못한 채 이야기는 계속된다. 한참 세 사람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들어갈 때 쯤 서서히 밝혀지는 연애조작단장의 과거. 진심.


사실 나 그때, 희중이랑 대현이형이 아무일 없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냥.. 오해하고 싶었어요.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

 
  그냥.. 오해하고 싶었어요.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 라는 얘길 듣는데 심장이 터질 것 처럼 아팠다.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나의 진심이랄까. 이 영화를 혼자 봤더라면 나 여기서 울었겠다. 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한 발 떨어져서 생각해 보면, 시간이 좀 더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게 아닌데. 사실은 그게 아닌데. 당시에는 그게 잘 안 보였다. '날 사랑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 '날 사랑한다면 저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더 나아가서 '저따위로 하는 거 보면 날 사랑하는 게 아냐'까지. 변명하고 싶지 않다. 실은 더 이상 변명이 안 나온다. 나는 그때 그냥 오해가 하고 싶었던 거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날 사랑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한다' 보다, '내가 싫으니까 그런 행동을 한다' 가 더 자연스러우니까. 그게 나한테 덜 힘드니까.

  저 연애조작단장님과 나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전혀 다른 연애를 했지만 따지고보면 결국 같은 이야기였다. 본인 마음이 답답하고 힘드니까 오해를 한 뒤 그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다그치고, 압박하고, 숨통을 죄어 상대에게 헤어짐을 통보받았다는 시시하고 껄렁한  지난 사랑 이야기. 사랑 얘기가 다 그렇다. 구체적으로 따지면 또 다 다르지만, 멀리서 보면 또 그게 그거다. 우리는 예전에 누군가가 했었을 사랑을 리어레인지 버젼으로 되풀이하고 있으며, 그 사랑은 또 우리가 모르는 다음 세대에 되풀이 될것이다. 결론은 아프고 힘들고 차이고 차고 다 그러면서 큰다는 얘기. 실수하고 하나 배웠음 됐다. 다음 사랑은 지금보다 더 성숙할 테니까.

 


성경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믿음, 소망과 사랑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한 때 저는 그 말을 이해 못했었습니다. 저는 그 중에 믿음이 제일이라고 생각했었죠.
바보같지만, 한 때 희중씨를 믿지 못해서 우리가 멀어졌던 적이 있었죠.
저는 사랑이 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랑보다는 믿음이 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었죠.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믿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믿는다는 것을.
그냥, 조금만 더 사랑하면 다 해결 될 문제인데.. 왜 행복한 순간은 그 때 알아채지 못할까요.
희중씨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이제 깨닫습니다.

더는 못 하겠어.
더는 할말이 없어.


  어쨌거나 저쨌거나 의뢰주와 그녀는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최종단계까지 오게 되는데, 마지막 고백 타이밍에 의뢰주가 대본을 까먹는다. 최종 고백 대본을 까먹은 그를 위해, 아니 한 때 사랑했던 그녀를 위해, 아니아니 실은 스스로를 위해. 연애조작단장은 그의 입을 빌려 그녀에게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바보스러움, 미안함, 후회.. 등. 그렇게 남은 감정의 부스러기를 세상에 탈탈 털어놓지만, 연애조작단장은 끝끝내 마지막 빈칸을 채우지 못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더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희중씨,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이것은 제 말입니다. 그러니까.. 뭐.. 그러니까 날 것 그대로의 제 마음이에요.
뭐 꾸미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제 마음은 이 한마디 뿐입니다.

트라우마는 저렇게 극복되는 거죠.

 

  그리고 이제 시작되는 새로운 사랑. 전 사랑이 끝끝내 채우지 못했던 빈칸을 새 사랑이 자신의 언어로 채우고. 전 사랑에서 얻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던 그녀의 트라우마는 새 사랑의 소소한 이벤트에 눈 녹듯 사라진다. 해피엔딩. 트라우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트라우마는 당연히 그걸 알고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고, 또 고칠 수 있는 거라고. 근데 요즘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꼭 그런것만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더 잘 고칠 수 있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 뭐 그런 기분. 뭐,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좀 더 살아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나?

 



ps.
  그렇게 미루고 미뤘던 시라노를 드디어 써냈는데,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나와 5년을 쭉 함께했던 사람 둘을 차례로 잃었다. 어째 내 5년이 통채로 날아가버린듯한 기분이지만. 뭐, 또 괜찮아지겠지. 산다는 건 어쩌면 계속 잃고 다시 채우는 과정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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