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지금은 우리가

취향 2016. 3. 23. 17:59

지금은 우리가

 

                                    박준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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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다시 나만 남았다

취향 2016. 2. 26. 20:02

다시 나만 남았다

 

                                    이생진

 

다시 나만 남았다

영혼을 쫓아다니느라 땀이 흘렀다

영혼을 쫓아다니는데 옷이 찢겼다

자꾸 외로워지는 산길

염소쯤이야 하고 쫓아갔는데

염소가 간 길은 없어지고 나만 남았다

곳곳에 나만 남았다

허수아비가 된 나도 있었고

나무뿌리로 박힌 나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내가 많아도 나는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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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호른과 기차

취향 2016. 2. 26. 19:52

호른과 기차

 

                                    이성미

 

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퇴장한 무대에 남겨진

의자 같고,

의자 위에 두고 간 호른 같고.

 

너의 슬픔은 검은 산처럼 깊고

늙은 소녀의 머리카락처럼 길다.

머리카락이 발까지 자라 흐르는 물.

 

너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몰라서 나는 너의 말을 듣고 있다.

토끼처럼 귀가 자라도록 들었지만

너의 슬픔은 손톱 반달만큼도 줄어들지 않았따. 그래서

나의 귀도 슬프겠구나.

 

너는 네가 메고 태어난 낡은 가방이 슬프고

가방 안에 든 우윳빛 털실 뭉치가 포근해서 슬프고

낡은 가방을 멘 너를 슬퍼하는 눈길 때문에 또 슬프다.

 

퍼덕거리는 물고기들을

양동이에 퍼 담았지만, 물이 없어 금세 죽어버렸다.

너는 목소리를 차가운 보도블록 바닥에 떨어뜨렸다.

 

네가 부르는 노래는 눈 덮인 하얀 철로.

나는 기차에 너를 싣고 달린다. 칙칙폭폭 소리를 내기 위해서 밤으로 난 철로 위를.

 

기치는 터널로 들어간다.

짐승들은 터널에서 맘껏운다.

너는 자격이 있다.

 

철로 옆에서 아이들이 작은 손을 흔든다.

내게 저런 작은 손이 있어

양동이에 하얀 눈을 담아서 너에게 주었으면.

이빨을 드러내고 웃을 만큼 충분한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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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오늘의 약속

취향 2016. 2. 26. 19:46

오늘의 약속

 

                                    나태주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 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나간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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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붙박이창

취향 2016. 2. 26. 19:39

붙박이창

 

                                    이현호

 

그것은

투명한 눈꺼풀

 

안과 밖의 온도 차로 흐려진 창가에서 "무심은 마음을 잊었다는 뜻일까 외면한다는 걸까" 낙서를 하며 처음으로 마음의 생업을 관둘 때를 생각할 무렵 젖는다는 건 물든다는 뜻이고 물든다는 건 하나로 섞인다는 말이었다. 서리꽃처럼 녹아떨어질 그 말은, 널 종교로 삼고 싶어. 네 눈빛이 교리가 되고 입맞춤이 세례가 될 순 없을까 차라리 나는 애인이 나의 유일한 맹신이기를 바랐다

 

잠든 애인을 바라보는 묵도 속에는 가져본 적 없는 당신이란 말과 곰팡이 핀 천장의 야광별에 대한 미안함이 다 들어 있었다 그럴 때 운명이란 점심에 애인이 끓인 콩나물국을 같이 먹고, 남은 한 국자에 밥을 말아 한밤에 홀로 먹는 일이었다. 거인의 눈동자가 이쪽을 들여다보는 듯 창밖은 깜깜. 보풀 인 옷깃 여미며 서둘러 떠나갔을 애인의 거리는 막막하고 사물들은 저마다의 풍속으로 어둠에 잠기는데

 

어디서 온 것일까

환기한 적 없는 집안의 먼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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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엉뚱해

취향 2016. 1. 3. 17:41

엉뚱해

 

                                    이장욱

 

갑자기 흥겨워지는 사람이 있고

갑자기 지쳐버린 사람이 있고

내일이 오자

문득 내 인생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있고

 

아침에는 私心이 없어졌다

긍정의 힘으로 나아갔다

중력은 고마워, 그게 없으면

십 년 전은 어디로 갈까

어제는 또 어디로

 

나는 펭귄처럼 무심해졌다

뒷골목을 헤매도 삐라가 없고

인공위성의 고도를 상상할 수 없고

북극의 밤은 길어

 

우리는 엉뚱하게

年金을 부었다

갑자기 미래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믿어요

 

저 앞에서 뒤뚱거리며

펭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엉뚱해 역시

펭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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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젖지 않는 마음

취향 2016. 1. 3. 17:36

젖지 않는 마음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보면

발 끝애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 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걸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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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너에게 쓴다

취향 2016. 1. 3. 17:32

너에게 쓴다

 

                                    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자리 잎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잎 진자리 새가 앉는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 풍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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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목숨의 노래

취향 2016. 1. 3. 17:29

목숨의 노래

 

                                    문정희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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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새끼 고양이

취향 2015. 10. 31. 15:02

새끼 고양이

 

                                    박연준

 

들키고 싶었어요

지붕 위에 오래 앉아

지난밤 꿈이 탈색되는 걸 바라보았죠

눈이 가늘어지고, 수염이 팽팽히 서고

점프해서 멀리

날아가는 상상도 못한 채

마음을 둥글게 말고 앉아 있었죠

들키고 싶어서

 

전깃줄을 타고 건너다니는 봄,

비밀은 너무 가볍거나 무겁죠

몇 번 웃어버리고 나면 얇아져요

 

머리를 누르는 건 모자가 아니죠

견고한 빛의 무게,

태양이 떨어뜨린 살비듬

 

매일이 환한 낮잠 같아요

가끔 담벼락을 손으로 짚고

울며 가는 사람을 볼때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죠

 

이봐요, 이번 생의 그림에선

파란 바탕이 나예요

당신이 울고 지나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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