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하관(下館)

취향 2014. 12. 24. 21:30

하관(下館)

 

                                    박목월

 

관(館)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따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따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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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가다

취향 2014. 12. 24. 21:27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가다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 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거리고, 그 그늘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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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푸른 밤

취향 2014. 12. 24. 21:22

푸른 밤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애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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