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젖지 않는 마음

취향 2018. 1. 2. 18:00

 젖지 않는 마음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 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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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1년

취향 2018. 1. 2. 17:57

 1년

  

                                    오은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이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딱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융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무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밤만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오릅니다

어제의 그 밤이, 그제의 욕심이, 그끄제의 생각이라는 것이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

주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실이 까마득합니다

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번에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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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달의 이야기

취향 2017. 6. 12. 14:22

달의 이야기

  

                                    서덕준


아픈 마음과 광활한 외로움은 잠시 뒤로 할게.

세상에 당신 하나 남을 때까지 철없이 빛나기만 할게.


나 아닌 아침과 오후를 사랑해도 좋아.

밤이면 내가 너를 쫓아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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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너는 또 봄일까

취향 2017. 6. 12. 14:16

너는 또 봄일까

  

                                    백희다


봄을 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름이 오면 잊을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생각이 나는 걸 보면

너는 여름이었나


이러다 네가 가을도 닮아있을까 겁나

하얀 겨울에도 네가 있을까 두려워


다시 봄이 오면

너는 또 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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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끝없는 이야기

취향 2017. 6. 12. 14:11

끝없는 이야기

  

                                    정끝별


내가 본 창경원 코끼리의 짓무른 눈꺼풀을 너도 봤다든가 네가 잡았던 205번 버스 손잡이를 내가 잡았다든가 2호선 전철에서 잃어버린 내 난쏘공을 네가 주워 읽었다든가 시청 앞 최루탄을 피해 넘어진 나를 일으켜준 손이 네 손이었다든가


네가 앉았던 삼청공원 벤치, 내가 건넜던 대학로의 건널목, 네가 탔던 동성택시, 내가 사려다 만 파이롯트 만년필, 네가 잡았던 칼국수집 젓가락, 내가 세들고 싶었던 아현동 그 집


열쇠 수리공은 왜 그때 열쇠를 잃어버렸을까

도박사는 왜 패를 잘못 읽었고 시계공은 왜 깜빡 졸았을까 하필 그때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사과를 건넨 그때는 왜 하필 그때였을까


너 있으나 나 없고 너 없어 나도 없던

시작되지 않은 허구한 이야기들

허구에 찬 불구의 그 많은 엔딩들은

어느 생에서야 다 완성되는 걸까


네 졸업사진 배경에 찍힌 빨간 뺨의 아이가 나였다든가 내 어깨에 떨어진 송충이를 털어주고 갔던 남학생이 너였다든가 혼자 봤던 간디 영화를 나란히 앉아 봤다든가 한날한시 같은 별을 바라보았다든가 네가 쓴 문장을 내가 다시 썼다든가 어느 밤 문득 같은 꿈을 꾸다 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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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안녕?

취향 2017. 4. 30. 14:47

안녕?

  

                                    박연준


안녕?

나는 잘 있어요

잘 웃고, 잘 먹고, 잘 죽어요

어제는 왜 나를 빚었나요? 내가 두개나 필요했나요?

그러나 안녕? 나는 웃어요.

접시가 깨져도, 발톱이 자라나도, 오줌을 싸면서도

아아, 나는 하품을 하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죠


발에 차이는 많고 많은 나를 하나만 집어

삼켜주세요 그리고 인사해요, 안녕?

내 꼬리를 떼어 목에 걸어 주세요

리본으로 묶어 주세요 꽁지가 빠진 나 같은 건

쓰레기통 속에 넣어 주세요, 그러나 살며시

넣으면서 인사해 줘요, 안녕? 웃고있니, 안녕?


부다페스트에선 내가 한 명이래요

그곳에선 절대로 웃을 수 없다고 해요

밤이 되면 사타구니 사이에서 혹처럼, 버섯처럼

슬픔이 돋아나고, 난 곧 남자가 될지도 모른대요

부다페스트에선 안녕? 하고 인사하는 건 반칙이래요


무너지는 겨울 숲에서, 머리가 홀랑 벗겨진 늙은 나무들만

안녕? 말하고 죽는대요

바람이 불고, 낡은 아버지 같은 건 흔적도 없이 진대요


아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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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우주행 러브레터

취향 2017. 4. 30. 14:28

우주행 러브레터

  

                                    서덕준


호흡이 네모나다.

원고지 칸칸에 적히는 자음과 모음

우주만 한 너를 잉크로 빚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네 이름 첫 자음인 ㅂ을 적으면

별, 바람, 밤하늘, 봄비 같은 것들이 문장 위로 떠다닌다.

무슨 말을 쓸까. 너는 무슨 단어가 필요할까.

내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낱말을 너에게 주겠다.

원고지에 나를 다 쓰겠다.


우표에 가만히 입을 맞춘다.

이 편지를 받는다면 너 또한 우표 위로 가만히 입을 맞춰 줘.


호흡이 네모나다.

우주만 한 너를 잉크로 빚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원고지 칸칸에 적히는 너의 두번째 이름은 우주,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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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아직도 숨바꼭질 하는 꿈을 꾼다

취향 2017. 4. 30. 14:25

아직도 숨바꼭질 하는 꿈을 꾼다

  

                                    이규리


이대로 깜빡 해가 질 텐데

누가 나 좀 생각해주면 안 되겠니


너무 꼭꼭 숨어버려 나를 잊은 채 새로 놀이를 시작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갈 수 없잖아

벗겨 놓은 바나나가 시꺼멓게 변할 텐데


적당히 들켜줄걸 그랬어

들켜주고 즐거울걸 그랬어


그렇기도 해

너무 꼭꼭 숨는 건 숨바꼭질이 아니지


놀이는 또 다음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선생님은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나를 호명하지 않았고......내 차례는 더이상 오지 않았어요


어서 가서 감자 넣은 갈치조림을 먹고싶어

붉은 매운 양념을 먹고싶어


포도나무가 어두워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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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방명록 2

취향 2017. 4. 30. 14:21

방명록 2

  

                                    김경미


나는 왜 극장처럼 어두워서야

삶이 상영되는 느낌일까


극장 매점의

팝콘처럼 하얗고 가벼운

나비같은 생은 어떤 감촉일지


가끔씩 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병아리 깃털이나 잎일 수 있는지

후, 불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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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남들이 시를 쓸 때

취향 2017. 3. 12. 22:11

남들이 시를 쓸 때

  

                                    오규원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오늘도 감기지 않는 내 눈을 기다린다.

잠이 혼자 먼저 잠들고, 잠의 옷도, 잠의 신발도

잠의 문패도 잠들고

나는 남아서 혼자 먼저 잠든 잠을

내려다본다.


지친 잠은 내 옆에서 쓰러지자 마자 몸을 웅크리고

가느다랗게 코를 곤다.

나의 잠을 어디로 갔는가.

나의 잠은 방문까지는 왔다가 되돌아 가는지

방 밖에는 가끔

모래알 허물어지는 소리만 보내온다.


남들이 시를 쓸 때 나도 시를 쓴다는 일은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라고

나의 시는 조그만 충격에도 다른 소리를 내고


잠이 오지 않는다. 오지않는 나의 잠을

누가 대신 자는가.

남의 잠은 잠의 평화이고

나의 잠은 잠의 죽음이라고

남의 잠은 잠의 꿈이고

나의 잠은 잠의 현실이라고

나의 잠은 나를 위해

꺼이꺼이 울면서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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